2021년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 개정으로 한국의 가상자산 서비스 제공업자(VASP) 신고 제도가 시행됐다. 이후 5년이 지난 2026년, 제도는 어느 정도 정착됐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복잡하다. 기존 사업자에게는 해자(垓子)가, 신규 진입자에게는 사실상의 장벽이 되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규제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설계가 잘못된 규제는 혁신을 죽이고, 기득권만 보호한다. 한국 VASP 제도의 문제는 규제의 존재가 아니라, 그 설계 방식에 있다.
VASP 신고 제도: 무엇을 하려 했는가
특금법 개정의 본래 취지는 명확했다. 자금세탁(AML)과 테러자금조달(CFT) 방지를 위해 가상자산 거래소를 제도권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신고하고, 실명 확인 입출금 계좌를 확보하고, ISMS 인증을 취득해야 한다.
그 결과는? 시장 집중이다. 신고를 완료한 VASP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고, 그 중에서도 실명계좌를 확보한 원화마켓 운영 거래소는 극소수다. 제도 시행 전 수십 개였던 거래소는 사실상 4~5개로 재편됐다.
신규 사업자가 부딪히는 현실
2026년 현재, 신규 VASP 신고를 준비하는 스타트업이 겪는 과정을 단계별로 살펴보면 문제의 구조가 보인다.
| 단계 | 요건 | 현실적 장벽 |
|---|---|---|
| 1단계 | ISMS 인증 취득 | 최소 6개월~1년, 비용 수천만 원. 서비스 출시 전에 취득해야 하므로 수익 없이 비용 선지출 |
| 2단계 | 실명 확인 계좌 확보 | 은행이 거래소와 제휴를 꺼림. 기존 4대 거래소 외 신규 계약 사례 거의 없음 |
| 3단계 | FIU 신고 심사 | 심사 기준의 불투명성. 어떤 경우에 반려되는지 명시적 가이드라인 부족 |
| 4단계 | 금감원 검사 대응 | 기존 금융기관 수준의 내부통제 요구. 스타트업 규모로는 사실상 불가능 |
결정적인 병목은 2단계, 실명계좌다. 은행 입장에서는 VASP 제휴 자체가 평판 리스크이며, 금융당국의 눈치를 봐야 한다. 리스크를 감수하며 신규 거래소에 계좌를 내줄 이유가 없다. 이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신규 원화마켓 거래소의 등장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비원화 마켓은 다를까
원화 거래 없이 코인-코인 거래만 제공하는 VASP는 실명계좌 요건이 면제된다. 이 덕분에 일부 신규 사업자들이 진입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원화 거래 없이는 한국 소매 투자자 접근이 불가능하다. 비원화 마켓은 결국 글로벌 사업자와의 경쟁이다. 규제 혜택도 없고 보호막도 없는 상태에서 바이낸스, OKX와 싸워야 한다.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
문제 1: 라이선스의 단일 트랙 구조
현재 VASP 신고는 사실상 ‘모 아니면 도’다. 거래소든, 커스터디든, 스테이킹 서비스든 모두 같은 VASP 신고를 해야 한다. 유럽 MiCA는 서비스 유형에 따라 규제 수준을 차등화했다. 한국도 서비스 유형별 라이선스 분류가 필요하다.
문제 2: 은행 협력 의무화 메커니즘 부재
실명계좌 문제는 시장이 자율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규제 당국이 은행들에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일정 요건을 갖춘 VASP에는 계좌 개설을 의무화하거나 공공 계좌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문제 3: 심사 기준의 불투명성
FIU 신고 심사에서 어떤 기준으로 승인·반려가 결정되는지 외부에서 파악하기 어렵다. 싱가포르 MAS, 영국 FCA처럼 심사 기준과 결과를 공개하는 투명성 기준이 마련되어야 한다.
문제 4: 혁신 서비스의 법적 지위 모호
DeFi 프로토콜 프론트엔드, 크로스체인 브리지, AI 기반 포트폴리오 운용 — 이런 서비스들이 VASP에 해당하는지, 투자자문업에 해당하는지, 아예 무규제인지 불분명하다. 이 모호성은 사업자에게는 리스크, 규제 회피자에게는 기회가 된다.
진입장벽이 해자가 되는 역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의 VASP 규제 구조는 기존 사업자에게 강력한 해자를 제공한다. 신규 경쟁자가 진입하기 어려운 시장에서 기존 사업자는 혁신 없이도 시장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이는 소비자 후생을 해치고 장기적으로 한국 가상자산 시장의 경쟁력을 약화시킨다.
- ✅ 서비스 범위를 좁게 정의하라: 처음부터 전면적인 거래소를 목표로 하지 말고, 커스터디나 특정 자산 클래스에 집중해 진입 비용을 낮출 것
- ✅ ISMS 인증 조기 착수: 개발 초기부터 보안 체계를 구축하고 인증 절차를 병행할 것. 나중에 붙이면 두 배로 힘들다
- ✅ 법무법인 전문팀 필수: VASP 전문 경험이 있는 법무법인과 초기부터 협력할 것. 규제 해석 비용은 나중의 행정 처분 비용보다 훨씬 싸다
- ✅ 은행 관계 선제 구축: 사업 초기부터 복수의 은행 담당자와 관계를 맺을 것. 계좌 개설은 실적과 신뢰가 쌓인 후에야 가능하다
- ✅ 글로벌 시장 병행 검토: 한국 규제 환경이 막히면 싱가포르, UAE 법인을 설립해 글로벌 시장에서 먼저 실적을 쌓는 방법도 유효하다
한국 VASP 규제의 현실은 냉혹하다. 진입 장벽은 높고, 기준은 불투명하며, 은행의 협력을 강제할 메커니즘이 없다. 이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한국 가상자산 시장은 소수 기존 사업자의 과점 체제로 고착될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장벽을 넘는 사업자에게는 강력한 경쟁 우위가 기다리고 있다. 규제를 리스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진입 장벽을 넘어선 자에게 주어지는 프리미엄으로 이해해야 한다.
규제는 바뀐다. 그 변화의 방향에 베팅하고, 변화가 오기 전에 포지션을 잡는 것이 전략적 사업자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