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돈은 믿음이다 – 허구에서 시작된 가치
우리는 매일 돈을 씁니다.
현금으로, 신용카드로, 이제는 스마트폰 하나로.
그리고 당연하게 생각하죠.
우리가 쓰는 이것들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 돈이라는 것은, 원래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돈은 ‘공유된 허구’입니다.
금속이든, 종이든—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기 때문에, 가치가 생기는 거죠.
그리고 그 믿음이 없다면?
돈은 그저 금속 덩어리,
종이 쪼가리,
혹은 은행 서버 안의 숫자에 불과합니다.
결국 돈은,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낸 믿음의 산물입니다.
이 믿음이 없다면, 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 ‘돈’이라는 존재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해왔습니다.
어떤 시대에는, 누군가 새로운 형태의 돈을 만들었고,
또 어떤 시대에는, 위기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돈의 형태를 바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 변화는 결코 점진적이지 않았습니다.
항상 혼란과 갈등이 뒤따랐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격동의 변화가 처음 시작되던 순간을
다시 마주하려 합니다.
2. 지폐의 정체 – 빚에서 시작된 약속
지금 우리가 쓰는 지폐,
과연 이것은 처음부터 ‘돈’이었을까요?
사실 과거의 지폐는 단순한 종이 쪼가리가 아니었습니다.
“이 지폐를 들고 오면, 당신에게 금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정부가 한 약속이자, 채무 계약서였습니다.
지폐는 정부가 보관 중인 금을
언제든 인출할 수 있다는 영수증이었죠.
사람들이 지폐를 믿을 수 있었던 이유—
그 뒤에 실물 자산, 즉 ‘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금은 희소했습니다.
희소한 만큼, 돈을 함부로 찍어낼 수 없었고,
덕분에 장기적으로 물가는 매우 안정됐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 사람들은
**“돈의 가치는 지켜진다”**는 강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또한, 각국의 통화가 금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환율도 안정됐고,
무역 거래에서 환율 리스크는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금본위제에는 분명한 한계도 존재했습니다.
첫 번째는 유동성 문제였습니다.
금이 없으면, 돈을 더 만들 수 없었습니다.
경제가 커져도, 금이 부족하면 돈을 공급하지 못했죠.
결국, 기업과 개인은
디플레이션과 경기 침체에 직면하게 됩니다.
불황이 찾아와도,
정부는 돈을 찍어 경기를 부양할 수 없었습니다.
대공황 역시, 금본위제가 상황을 더 악화시킨 측면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문제가 있었죠.
그 시대에는 ‘금’이 곧 ‘경제력’이었습니다.
그래서 금이 많이 나는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금본위제는 겉보기엔 공정한 시스템이었지만,
사실은 지정학적 갈등과 침략의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런 구조적인 한계들로 인해
세계는 금본위제를 벗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벗어나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약속을 깨고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는 것.
다음 이야기에서는,
그 첫 번째 약속 파기의 순간을 살펴보게 됩니다.
3. 첫 번째 신뢰 붕괴 – 영국의 약속 파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영국 정부는 전쟁을 치르기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죠.
그 해 7월 31일.
수많은 사람들이 지폐를 들고
영란은행 앞에 줄을 섰습니다.
지폐를 금으로 바꾸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은행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휴무일을 연장하며
사실상 금 지급을 중단했습니다.
금은 잠시 후 다시 돌려주겠다는 식의 태도였지만,
사람들은 점점 불안해졌고,
그 불안은 금본위제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1915년 8월 6일.
영국 정부는 재무부 명의로
공식적인 호소문을 발표합니다.
“국익을 위해 아래 사항에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
금화 대신 지폐를 사용해 주세요.
-
금화를 요구하지 말아 주세요.
-
일상적인 거래에서도 지폐를 사용해 주세요.
이 발표는 지금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상 정부가 국민과 맺은 금 상환 약속을 파기한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지폐는 더 이상 금으로 교환되지 않았습니다.
금본위제는 무너졌고,
세계는 그때부터 ‘새로운 통화 체제’의 문 앞에 서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책 변경이 아니었습니다.
국가가 국민과의 신뢰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사건,
그리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사실상의 디폴트 선언이었죠.
그로부터 16년 후,
1931년.
영국은 금본위제를 공식적으로 종료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현대 화폐 시스템의 본격적인 시작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4. 두 번째 붕괴 – 미국의 금 몰수와 닉슨 쇼크
1933년, 미국.
대공황의 한복판에서 새로운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취임합니다.
당시 미국 전역은 뱅크런(bank run) 으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은행이 무너지기 전에 내 돈부터 찾자”는 생각에
줄을 서서 금을 요구했고,
은행은 예금자에게 줄 금이 부족한 상황이었죠.
루즈벨트는 선거 당시에는 금본위제를 지키겠다고 약속했지만,
시장은 이미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새 정부는 달러를 평가절하할 것이라는 신호를요.
이 불안은 걷잡을 수 없는 공포로 확산됐고,
미국 금융 시스템은 붕괴 직전까지 몰립니다.
1933년 3월 5일, 일요일.
루즈벨트는 대통령으로서 첫 번째 조치를 내립니다.
전국 모든 은행에 일시 휴업 명령.
미국 경제를, 말 그대로 잠시 멈춰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한 달 뒤,
더 충격적인 명령이 발표됩니다.
모든 국민은 금을 연방준비은행에 인도하라.
개인의 금 보유가 불법이 된 것입니다.
이제 지폐는 더 이상 금으로 바꿀 수 없는
**‘불태환 화폐’**가 되었습니다.
이 조치는 국내에서 금본위제를 사실상 종료시킨 것이었고,
그 이후에도 미국은 외형상 금본위제 국가처럼 행동했지만—
실제로는 **‘가짜 금본위제’**에 불과했습니다.
달러를 금으로 바꿀 수 있는 권리는
오직 외국 정부에만 남아 있었고,
그 교환 비율은 1온스에 35달러,
미국 정부가 임의로 정한 고정 환율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71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은
이 마지막 약속마저도 파기합니다.
외국 정부에게도 더 이상 금을 지급하지 않겠다.
닉슨 쇼크(Nixon Shock).
이 순간,
금본위제는 완전히 종료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점을 기점으로
지금의 피아트 화폐 시스템(Fiat Money System) 으로
완전히 진입하게 됩니다.
돈은 더 이상 금에 의해 보장되지 않습니다.
5. 신뢰에서 통제로 – 국가의 권위가 곧 돈이 되다
과거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지폐를 은행에 가져가면
그 지폐에 적힌 만큼의 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신뢰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 믿음이 바로,
금본위제의 핵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금으로 교환해 줄 것이라는 신뢰’가 무너지자,
금본위제는 붕괴했고,
세상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그 누구보다도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화폐란 결국, 사람들의 믿음 위에 세워진 상징이라는 사실을요.
사람들이 지폐를 가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지폐는 화폐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이고,
그 믿음이 무너지면, 화폐도 무너진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습니다.
“이 믿음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국가에 대한 신뢰가
곧 화폐에 대한 신뢰로 이어지도록 만들어야 했던 겁니다.
이제 사람들은 지폐를 믿는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권위를 믿고 지폐를 받아들입니다.
“국가가 인정한 것만이 돈이다.”
그러나…
만약 국가에 대한 신뢰마저 무너진다면?
그 순간,
화폐 시스템 전체가 붕괴할 수 있습니다.
그건 단순한 경제 위기가 아닙니다.
신뢰의 기반이 무너지는, 전면적인 질서 붕괴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런 신뢰의 균열이
전 세계 곳곳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 루블의 가치가 폭락한 것도
결국은 국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화폐의 신뢰도 함께 붕괴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비상 계엄령 사태가 발생하자
달러 대비 원화의 가치가 급락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지금,
‘우리의 돈’이 가진 가치를, 국가라는 구조에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화폐는 더 이상 ‘금에 의해 보장된 가치’가 아닙니다.
이제는 국가의 법과 명령에 의해 통용되는 통제의 수단이 된 것이죠.
돈은 신뢰의 상징에서, 통제의 도구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언제나,
‘국가’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6. 돈의 미래 – 우리는 다시 갈등의 중심에 있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는,
인류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돈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언제나 반복되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바로, “돈이란 이래야 한다”는 고정된 인식입니다.
어느 시대든 사람들은
자신이 익숙하게 써오던 화폐 형태를
‘정상적인 돈’, **‘진짜 돈’**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금화이든, 은화이든, 종이 지폐이든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 기준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화폐가 등장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사기, 허상, 혹은 광기라고 여기게 된다는 겁니다.
실제로 역사를 돌아보면,
새로운 화폐는 종종
무책임한 실험, 사회적 반란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금본위제에서 법정화폐로 넘어갈 때조차,
사람들은 큰 혼란과 저항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다시 한번
새로운 형태의 돈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미 70년 넘게 법정화폐 체제 안에서 살아온 우리는,
현금을 곧 화폐라고,
화폐를 곧 국가가 보증하는 가치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죠.
하지만 이제,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의 화폐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자산, 암호화폐,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그리고 탈중앙화된 네트워크 기반의 돈.
우리는 또 한 번 묻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돈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무엇이 진짜 돈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이 질문은,
단순히 기술이나 제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의 문제이며, 선택의 문제입니다.
무엇이 돈이 되었고,
무엇이 돈이 되지 못했는가는
결국 인간의 선택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누군가는 더 많은 것을 얻었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같은 시대, 같은 조건 속에서도
선택의 차이는 엄청난 결과를 낳았습니다.
경기가 좋을 때, 어떤 사람은 리스크를 감수해 부를 늘렸고
경기가 나쁠 때, 어떤 사람은 그 리스크 때문에 전부를 잃었습니다.
시대는 바뀌고,
돈의 모습도 바뀌어 왔습니다.
하지만 돈을 둘러싼 갈등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